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영화들이 있고, 앞으로 나올 영화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난 이 중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난해하게 느끼는, 소위 말해 난해한 영화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특이한 오프닝 시퀀스를 갖고 있는 영화 <세븐>은 대학교 1학년때 우연치않게 시청했던 영화이다.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과 그 과정속 단테의 신곡의 일곱개의 대죄를 테마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와 그를 쫒는 두 형사. 사실 갓 성인이 된, 어제까지만 했던 고등학생 이었던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영화였다. 하지만 그 점이 나에겐 이런 난해한 영화에 빠지게 된 계기였었다.
영화가 어렵다. 난해하다. 라는 기준의 객관적인 지표가 있을까? 물론 영화를 받아드리는 것은 온전히 개인 몫이기에, 주관적인 측면이 상당하지만 난해한 기준의 척도가 어느정도는 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등장인물의 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븐>을 예시로 들어보자면 세븐의 살인마 존은 살인을 자신의 살인 테마인 일곱개의 대죄를 바탕으로 지속하다 결국 여섯번째 살인테마. “질투”라는 테마의 희생양으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밀스 형사의 아내를 지목했다. 즉, 서머셋 형사를 질투하여 서머셋의 삶을 살고 싶었던 그의 질투심으로 유발된 살인이었던 것이다. 서머셋은 살해된 아내의 목을 보여줬던 살인마를 동료 형사 서머셋이 강력히 막았음에도 결국 총살한다. 살인마는 자신의 죽음을 일곱개의 대죄라는 살인 테마의 마지막 일곱번째의 대죄, 분노에 자기자신을 설정했고, 형사 서머셋이 자신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살인테마가 완성되게끔 설계했다.
여기서 관람객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밀스가 살인마를 죽인건 정말 잘한 짓이야.” 라고 할 수도 있고, “밀스는 그 살인을 하지 말았어야해”라고 하는 자들도 있을것이다. 영화가 딱 끝나고 이렇게 사람들끼리 결말을 두고 토론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매력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두번째로 내가 얘기할 측면은 결말의 모호성이다. 모든 결말이 모호한 영화가 훌륭하진 않지만, 훌륭한 영화의 대부분은 결말이 모호하다. 여기서 열린 결말과 결말의 모호성을 헷갈리면 안된다.
열린결말은 이야기의 끝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그 이후 상황에 대한 결론을 의도적으로 내리지 않는 것이다. 모호한 결말은 해석이 여러가지가 가능하도록 애매하게 끝맺음을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결말의 모호성을 보이는 영화로는 <올드보이>가 있다. 학창시절 자신이 목격했던 장면을 친구에게 얘기한 대가로 소문이 퍼져 사람이 죽고, 자신은 15년간 갇히며 자신의 아내를 잃게 되고, 자신의 딸과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한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는 복수를 당한다. 이 복수자는 그 소문의 당사자인 이우진이다. 이 복수가 끝나고 이우진은 결국 자살하고 오대수는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고 최면을 받는다. 최면이 끝난 후 자신의 딸이자 연인인 미도가 “사랑해요 아저씨”라 하고, 오대수는 아주 기쁘게 웃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영화가 끝난다.
여기서 오대수는 정말 기억을 지웠을까? 지웠다면 자신과 딸과 진정으로 사랑을 할까? 만약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면 그는 왜 웃었을까? 이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이는 영화의 여운을 관람객들에게 상당히 남길 것이다.
세번째는 캐릭터의 선악의 불분명해야하는 것이다. 영화에 선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 악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이분법적으로 나뉜다면 뻔한 이야기일 수 밖에 없다. 그에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범죄도시>, <어벤져스>, <극한직업>이다. 흔히 말하는 오락 영화이다. 이 영화들이 안좋은 영화인것은 아니지만, 난해함과는 거리가 먼 단순하면서 재밌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의 단점은 시청이 끝나고 나면 “와 액션 좋다” 와 같은 외적인 부분만 사람들이 집중하게된다. 캐릭터 자체의 배경과 감독의 의도보다는 과격한 액션에 집중되어 다른 매력들을 못느끼는 측면이 있다.
선악의 공존성을 대표적으로 보이는 예시는 폴 토마스 엔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라는 영화에 대해 서술하고자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석유사업자 플레인뷰가 석유 시추할 땅을 찾던 중 폴다노가 연기한 시골 청년 일라이가 자신의 집 근처에 석유가 있다면서 땅을 파는 걸로 영화는 시작하는데, 일라이의 마을에 석유를 시추하기로 결정 후, 그 근처에 석유 시추 시설 뿐만 아니라, 일라이의 계약 조건 중 자신의 교회를 지어달라고 요청하고, 일라이가 일종의 제사장이 되어 그 시추산업을 위해 기도를 하겠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는데 여기서부터 플레인뷰와 일라이의 갈등이 극대화된다. 이 둘은 서로의 경제적 이익, 자신들의 철학적 의미를 위해 끊임없이 갈등하는데, 이때 결국 일라이는 경제적 부유를 갖고 있는 플레인뷰에게 굴복하고만다.
사이비 교주인 일라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랑했던 자신의 아들도 버리는 무자비한 사업자인 플레인뷰. 우린 여기서 선악을 구분할 수 없다. 사실 둘 다 형편없는 인물이다. 이런 불분명함을 갖는 인물들을 출현시켜 우리가 관람할때의 장점은 그저 단순한 외부적 시각요소가 아닌 영화의 내부적인 인물끼리의 상황, 감독이 설정한 영화의 플롯에 심취를 할 수밖에 없다. “이 캐릭터는 도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지?”, “왜 감독은 이렇게 캐릭터를 설정했지” 라는 질문들이 나오는 것이 난해한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난해한 영화의 매력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것이라 생각한다.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말은 거창하지만 영화를 시청하고 나서 시청자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끔 되었는가? 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진정으로 시청했던 영화의 여운을 느끼며 나의 삶을 돌아보고, 내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평소에 생각했던 생각들이 맞았는지, 혹은 평소에 하지 않는 생각들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영화들이 몇몇 있다.
이 중 기억에 상당히 남았던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다. 영화는 소설가가 꿈인 청년 종수, 종수의 어린 시절 친구인 해미,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가 만난 벤이라는 세 인물의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해미가 갑자기 사라지는데, 그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흐름이 시작된다. 종수는 해미의 실종은 벤의 관련이 있다고 의심을하고, 벤의 정상인과는 다른 특이한 행동에 더욱 더 의심을 하며 결국은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 벤을 결국은 살해하고 그가 타고 있는 차를 불태우며 영화는 끝난다.
그럼 이런 내용의 영화가 왜 철학적 의미가 있는가. 먼저 인물들의 정체성과 우리의 정체성을 비교해볼 수 있다. 먼저 청년 종수라는 인물.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며 자신의 소설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해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아프리카라는 이국적인 장소로 해외 여행을 갔다. 또한 벤은 자신의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도 늘 권태를 느낀다. 여기서 나는 성별과 사회적 계급에 따라 다른 그들의 고민을 보며 공감이 가는 부분이 상당했다. 청년 종수의 나이와 비슷한 나는 지금은 나의 직업, 나의 미래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사는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데 그것의 결론은 늘 돈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공부를 하며, 직업을 갖는다. 이런 경제적 관점만 생각하는 우리가 과연 맞는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우리가 돈을 잘 버는 사람이 되어도 끝없는 욕심과 끝없는 권태는 계속되지 않을까.
이어서 이러한 인물들의 격차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화를 보다보면 벤의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인해 종수와 해미를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가 많이 보인다. 이런 의도적인 연출로 인해 상당히 불편하게 느꼈을 사람도 꽤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난 이 점에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받아드려야할까? 마르크스는 과연 현 시대를 보면 자신의 사회주의적 생각을 고수했을까? 이런 개인적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몇 단계 더 고차원적인 생각을 해볼수도 있다. 영화의 메인 내용은 “미스터리”이다. 영화의 결말은 종수가 벤은 살인범이라는 확신으로 벤을 살해한다의 내용이지만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또한 해미의 실종은 현실이 아닌 종수의 상상일수도 있다. 과연 어디까지 현실일까? 해미는 과연 실존했을까? 또 과연 벤을 살해한 것을 맞을까?
영화는 계속 우리가 시청하고 있는 이 장면과, 등장인물이 어디까지 진짜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그러한 경계가 우리 현실에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여기서 나는 <시물레이션 현실론>을 떠올렸다.
이 이론을 쉽게 설명하면 인간이 멸망할 시점에는 지금 과학기술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과학기술을 가졌고, 멸망 시기가 다가올때, 과거부터 거슬러 올라오며 멸망이 되지 않을 시물레이션을 돌려볼 것이다. 그를 위해 지금보다 훨씬 과거부터 시작한 수도 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멸망되지 않을 시나리오를 찾는다는 이론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2024년 지구도 그 수많은 시물레이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현실이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그 현실이 맞을까? 2차원적인 존재가 z축을 지니고 있는 3차원적 존재인 우리를 인식 못하는 것처럼 우리보다 고차원적인 존재가 만든 시물레이션 그 속의 환상일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난해한 영화들의 기준은 사실 상호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한 결말이 있으면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해석이 나오며, 그런 다양한 해석으로 철학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사람들과 토론하고 평가한다. 그런 과정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 단순히 영화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 더하여 이런 과정이 있다면 더욱 더 영화를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몇몇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데 무슨 난해함이냐, 철학이냐 있어보이는 척 하는 것아니냐?”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의 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그때 “있어보이는 척하는 게 있는것이다” 라고 말을 했다.
과격하게 말해 있어보이고 싶어서 이런 난해한 영화를 즐겨보는것이라 해도, 그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취향을 존중하지 못하고 메스컴에 현혹되어 유명한 영화들만 보고 마이너한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있어보이는 척한다는 프레임을 씌우는게 더욱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단순히 상업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수단일수도 있고, 영화 하나로 자신의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며 인생의 방향을 결정될 계기를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사람마다 받아드리기는 다 다르며 답은 존재하지 않는 점이 난 영화의 매력인 것 같다. 내가 설정하고 서술했던 난해한 영화의 기준점은 누구에게는 받아드려질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받아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영화를 감상한다면, 영화를 시청함으로써 더욱 더 즐길거리가 많아야 투자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감상이 책 읽는 것 만큼 교양과 지혜를 쌓는데 도움이 될까? 라는 질문에 영화평론가 이동진에 따르면 “책은 물같은 것이고, 영화는 술같은 것이다.” 라고 했다. 물은 좋은 의미로 우리를 차갑게 만들고 술은 우리를 좋은 의미로 우릴 뜨겁게 한다.
난 여기서 그런 술을 아무 생각없이 퍼마시는 것과 천천히 음미하여 마시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생각한다. 이성의 속성이 차갑듯, 우리는 영화라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는 것이 적절한 접근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의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단순하고 쉬운 영화든, 조금 난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영화든, 모든 영화 취향은 그것이 불법적인 것이 아닌 이상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난해한 영화도 그들의 선택지에 포함되어 같이 즐기는 건강한 영화 문화가 생겼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최원빈 작성. 2024.